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켓 가든 작전 (문단 편집) == [[머나먼 다리]] == 한편 이에 호응하여 진격 중이던 영국 30군단의 "가든 작전"도 초창부터 삐끗거리고 있었는데, 예정대로라면 첫날 101공수부대가 있는 에인트호번까지 몇 시간 안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연합군 상층부의 말대로 독일군이 정말 소년병에 자전거 뿐이라면, 거기서 나오는 빈약한 화력 따위 후속부대에게 전투를 맡기고 무시하면서 진격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진격로가 우회로도 없는 도로 하나였는데다 매복한 독일군들은 대전차포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진격로가 여러 갈래였다면 다른 길로 진격하는 부대가 있기에 걱정할 것 없지만, 문제는 30군단의 주 진격로가 69번 국도 단 하나였다는 점이다.[* 문서 상단의 당시 작전도에 총 3개의 연합군 진격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왼쪽과 오른쪽의 진격선은 주력 엄호를 위한 조공일 뿐 실제 작전의 주력인 30군단은 가운데 진격선인 69번 국도로만 진격했다.][* 이로 인해 전차 한대를 격파하는 순간 격파된 차량 뒤에 따라오는 모든 병력이 멈춰서버리게 되어 진격이 훨씬 지체되었다. 이는 30군단이 영국 공수부대가 아직 버티고 있을 때 아른험에 도착하는데 실패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30군단은 아인트호벤에 예정보다 늦은 9월 18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독일군이 앞서 교량 하나(Son 교량)을 날려버린 까닭에 임시교량을 준비하느라 발목이 잡혔다. 결국 약 36시간 정도가 지체되어 9월 18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네이메헌에는 9월 19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고 여기는 독일군이 네이메헌 대교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또 발목이 잡혔다. 결국 82공수사단이 30군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보트로 반대쪽에 상륙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인 끝에 교량을 탈취하였지만 독일군 역시 맹렬하게 반격한 까닭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였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 잔당이 30군단 보병부대를 네이메헌 시가지에서 묶어버리는 바람에 보병부대가 전투를 끝내고 합류한 다음에 진격하라는 작전 사령부의 명령으로 선봉 기갑부대는 다리를 건넜는데도 진격하지 못하고 아른험에서 아군 공수부대가 쓸려나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갑부대 단독으로 아른험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사령부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 네이메헌에서 아른험까지의 약 18km 정도의 구간은, 지금까지 진격해온 구간과는 다른 완전한 제방 둑길로 도로 주변에 나무 한 그루 없는 탁 트인 습지에다가 도로 부분이 주변보다 높아 일명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구간으로 이런 곳을 보병의 엄호 없이 진격하다간 적의 매복에 걸려, 아른험에 도착하기는커녕 선봉 기갑부대가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기갑부대는 울며 겨자먹기로 보병이 빨리 전투를 끝내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군 장교 중 한 명은 이 상황을 보고 "독일군 놈들이 좋아서 손을 싹싹 비비면서 우리를 죽일 거다"라고 투덜댔다. 특히, 9월 20일까지 가든 작전을 마치기로 했는데 이 시점에서 작전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한편, 영국 제1공수사단은 아른험에서 12km나 떨어진 곳에 강하하는 바람에[* 아른험 자체가 공수부대로 공략하기엔 꽤 난점이 많았던 것도 있었다. 당시 연합군 공수부대는 수송기에서 보병이 바로 강하하는 것 외에도 각종 공수부대용 중화기나 마찬가지로 공수부대원, 보급물자, 그리고 지프 등의 이동수단을 별도의 공수용 글라이더에 탑재해 공수하는 식으로 운용했는데, 아무리 글라이더가 가볍다 하더라도 안에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면 일반 수송기와 도찐개찐이 되버린다. 즉, 글라이더가 착륙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단단한 땅을 골라야 했는데, 네덜란드는 대부분이 습지에 물렁한 땅 투성이다. 그래서 단단하면서 제일 가까운 지형인 아른험 북쪽이 후보가 되었는데, 막상 살펴보니 그곳은 아른험 북쪽 '델런'에 위치한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는 루프트바페의 사정권에 들어가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둘러보니 그나마 가장 적합한 곳이 아른험에서 서쪽으로 12km 떨어진 지점이었다.] 남쪽의 다른 두 공수부대에 비해 다리에 도착하는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휘하의 지프 대대를 글라이더로 수송, 다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려 하였으나, 지프 대대를 실은 글라이더가 착륙한 지점을 독일군이 급습, 전멸당하고 만다. 기동력을 잃은 영국 제1공수사단 본대는 할 수 없이 다리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2 SS기갑군단 휘하 독일군 부대들이 아른험으로 가는 길을 점령, 선발대와의 연결을 차단해버려 본대는 아른험에 도착한 9월 17일에서 4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른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른험 외곽 '오스테르베크'에서 독일군과 분투하며,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모델 원수의 증원부대에 오히려 점점 포위되고 있었다. 그나마 초기에 강하한 선발대 중, 존 프로스트 중령의 1개 대대 병력 750여 명 만이 다리 북쪽에 도착해 목숨을 걸고 다리 남쪽에서 오는 제9 SS 기갑사단과 아른험 북쪽에서 오는 제10 SS기갑사단의 장갑차량&모델 원수의 증원부대들을 무력화시키면서 아른험 대교 입구를 사수하고 있었으나 작전 계획이 제대로 틀어진 데다가 지속적인 독일군의 포격에 대부분의 전투부대가 박살이 나버려서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었다.[* 여기에 깨알 같은 일화가 하나 있다. 4일째 버티고 있던 프로스트 중령의 선발대에게 제 2 SS 기갑군단 사령관 [[빌헬름 비트리히]] SS대장이 그 용맹함을 존중해, 전령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오해였는지 패기였는지 선발대는 오히려 독일군 전령에게, “우린 포로를 잡아 둘 만큼 여유롭지 않다”며 비트리히의 항복 권유를 동문서답으로 거절해버린다. 그리고 비트리히는 다음 날 씁쓸한 기분으로 선발대를 포함한 아른험 대교 주변부를 총공세로 쓸어버린다(...). 사실 이건 이 작전을 다룬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사실을 조금 각색한 이야기로, 실제로는 모델 원수가 항복을 권유했다고 한다.] 연합군은 교두보를 강화하기 위하여 9월 21일 [[자유 폴란드군]] 제1독립공수여단을 투입하였지만 투입시기도 늦고, 착륙지점도 전투를 벌이며 격전지로 가기에는 거리가 있었고 전황을 뒤엎을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군과 똑같이 따로 포위당해 비관적인 상황에 빠졌다. 심지어 강하지점마저 독일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결국 9월 25일 더이상 버텨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연합군은 작전을 중지, 네이메헌을 넘어 아른험을 수 km 앞두고 진격하던 30군단은 그 자리에 멈추고, 영국 공수부대와 폴란드 공수부대의 얼마 남지 않은 잔존병력은 라인 강 너머로 간신히 철수하였다. 영국군 공수사단의 피해가 커서 1만 명이 넘는 강하병력 중 약 2,000명의 탈출 부대원만 남고 전멸했다. 전사자는 2000명 조금 못 미치고 포로는 무려 7000여 명에 달했는데, 마지막 철수 때 사령부에 수용된 부상병들을 철수시킬 여력이 안 되어 독일군이 오면 항복케 하고 남겨두고 가야 했기에 포로가 많이 발생했다. 이때 인도적인 차원에서 [[군종장교]]와 [[군종병]], [[군의관]]과 [[의무병]]들이, 철수 사실을 숨기기 위한 교란 임무 수행 차원에서 남은 [[통신병|통신]]병과 인원들과 함께 남아있다 항복하도록 했다. 9월 27일에 이러한 피해 상황 집계를 독일군 최고 사령부가 발표하자, 영미연합군의 우월한 전력을 익히 알고 있던 영국 국민들은 믿겨지지 않는 참패에 패닉에 빠졌고, 급기야 수상인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적이 숫자를 부풀려 발표했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결국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피해 상황을 재집계할 것'을 명령했는데, 현장에서 집계한 결과 '''기존에 발표한 수치보다 더 많은 영국군 피해가 집계됐다고 한다.'''(Obersturmbannführer Walter Harzer Interview) 이로써 영국 제1공수사단은 실질적으로 전멸을 면치 못하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